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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11. 재림교회는 불교식 구원이다.2017-06-29 18: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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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행위을 강조하여 <행하는 자라야>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뭘 행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여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냐?’고 하였더니 십계명이고 산상보훈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불교식 구원입니다. 산상보훈처럼 행할 수도 없거니와 만의 하나 그렇게 해서 구원을 얻는다면 그 구원은 은혜로 받은 것도 아니요 선물도 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구원은 믿음과 행함으로 받는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B.  이 성경절에 더 넓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할지라도

나타난 의미는 그대로 받아드려야한다.

만분의 일이라도 토를 다라서는 안 된

어떤 시인은 다정의 개념은 곁을 주는 것이라 했.

과연 이 성경 말씀을 불교의 곁에 두어야 하는가.

하늘샘이 주장하는 요지는 이렇다.

 <행해야 된다, 무엇을, 아버지의 뜻을, 그것이 무엇이냐, 십계명과 산상보훈이다. 그것을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면 기독교는 불교와 같다고 하면서 <구원은 믿음과 행함이 이니다.>라는 주장이다

오호라, 이것이 하늘샘이 주장하는 긍극적인 진실이라면

야단이로다

오호라 야단이로다.

그 아까운 영혼들을 어찌할꼬!

그것은 마치 문이 닫혔다고 문밖으로 따스한 빛이 흘러오는

그 때의 그런 눈물의 경험을 모르는 사람이다.

숨을 쉬듯이 심장이 뛰듯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뱃속에 있을 때의 기억을 지킬 수 있었을까

죽고 태어나는 것,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로 움직여 갈때마다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숫한 고비고비들,

우리의 일커수 일투족을 꽤매어 주시는 예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시는 것을!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은 주머니가 없고 계절이 없고 낮과 밤이 없다. 그렇게 많은 것이 없다면 밤이다. 밤과 같이 그들은 미련하여 시은소 밑에 가두어둔 십계명의 빛을 보지 못한다.

산산보훈과 십계명의 따뜻한 햇빛처럼

나를 이처럼 따뜻하게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휘청거리는 가냘픈 여인에게 예수가 나타나셨다. 막막한 사막에 두 개의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거기에는 이제 네 개의 발자국으로 늘어났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네개의 발자국은 갑자기 두 개로 바뀌였다.

예수는 여인을 두고 떠나가신 것인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여인을 업고 걸어가신다.

<십계명, 산상보훈>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할 때 체워주시는 주님이 함께 계신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호주머니가 있고

계절이 있고

주머니에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

햇빛을 잔뜩 받고 따뜻하게 나의 몸을 녹혀주는 따뜻한 옷이 있다.

이 옷은 성도의 두루마기다.

두루마기는 행위를 상징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덮어주신 옷이다.

주님의 행위를 나의 행위로 덮어주신다.

속옷은 더러운 그대로인데 덮어주시고는 곧 바로 의로 여기신다.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행위이다.

더 햇빛을 담뿍 받은 두루마기는

대신 행해 주신 주님이 따뜻한 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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